첫째 아이부터 얘기해야할 것 같다. 여성의 임신과 출산은 참으로 소중한 경험인 것 같다. 두 아이를 가져보고 낳기까지의 체험은 그 사이에 만난 요가와 더불어 나 자신을 새롭게 알아 가는 과정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다. 첫아이를 임신해서는 남편이 내게 축하인사도 못할 정도로 이제 내 인생은 이 아이에게 묶여 꼼짝 못하겠지 싶은 마음에 무척 가라앉아 있었다. 그 부정적인 마음을 털어 내려고 보다 적극적으로 아기와 임산부에 대해 공부했다. 새로움에 호기심이 많은 편인 난 알아갈수록 생명의 경이로움에 빠져들었다. 입덧이나 가려움증, 소화불량 등 임부들이 흔히 겪는 증상들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새 생명의 존재를 인식할 뿐, 실제 배가 어느 정도 불러와도 내 안의 또 다른 무엇을 진정으로 느끼는 것은 참 막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조금씩 변화를 겪고있는 내 몸을 ‘느끼려’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참으로 평온해짐을 느꼈다. 아마도 첫아이 출산이후 6개월만에 다시 임신을 한 것은 그때의 그 마음의 평화를 다시 한번 경험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늘 함께 있었기에 필연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둘째 아이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땐 그 밤을 생각으로 하얗게 지샜다. 첫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출산당일의 체험은 임신중 느꼈던 평화와 기쁨으로 아주 잘 준비된 시험을 치르는 양 은근히 출산일을 기다릴 정도로 자신감에 차있던 나를 무참하게 한방에 날려버렸다. 일주일에 두세 번의 가벼운 임산부 출산체조만으로는 근 삼십년동안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던 근육들을 일시에 사용해야 하는 출산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본격적인 자궁수축이 오기 시작했을 땐 지속적인 호흡으로 아이에게 충분히 산소를 공급해서 산모이상으로 힘이 드는 아기를 돕는다는 학습된 엄마로서의 본연의 자세는 상실하고 그저 아득해지면서 이 시간이 어서 끝나버렸으면하는 마음 외엔 없었다. 출산시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만 몸을 잘 추스를 수 없었다. 꼬리뼈부분에 무리가 많이 갔는지 앉는 자세에서는 통증 때문에 늘 엉거주춤했다. 하루에도 두세 시간 간격으로 수유해야하는데 앉기조차 고역이었다. 머릿속에서는 계속 땀이 나서 축축했고 목 뒤로는 계속 한기가 느껴져 오슬오슬 추웠다. 일련의 증상이 잘 준비되었다고 믿었던 시험을 엉망진창으로 치르고 나온 듯한 그 고약스런 경험을 자꾸 떠올리게 했다. 그렇게 6개월이 흘렀을 즘에 둘째가 갑작스럽게 생겼으니, 생각이 많은 것이 당연했다. 둘째에게 마음 깊이 양해를 구하고 오늘 하루만 고민하자하고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출산을 위한 몸만들기(?)에 돌입했다. 기체조 교실을 꾸준히 다녔다. 덕분에 임신중의 붓는 증세나 저린 증세는 모르고 지냈다. 하지만 첫아이는 성장이 빨라 일찍부터 기고 걸어 활동범위가 점차 넓어지고 일을 저지르는 것도 심해져가는데, 내몸은 조금씩 버거워지고.... 첫아이 임신 중에서처럼 편안히 새 생명과 내 몸을 귀기울여볼 수 없는 가운데 임산부체조만으로 만족스럽지가 못했다.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출산 꼭 석 달을 앞두고 명상요가센터를 처음 찾게 되었다. 우연히 사당에서 찾게 된 것이다. 편안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스러웠다. 차츰 평온한 기쁨으로 내 생활전반이 안정을 찾아갔다. 좀더 일찍 요가를 알았더라면...의 생각을 잠깐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이제라도 그 기회를 제공해준 둘째가 무척 효녀라고 생각하며 감사했다. 대신 만나는 사람들에게 틈틈이 권했다. 요가 한번 해보라고. 임신기도 잘만 보내면 인생을 새로 만날 만큼 굉장한 경험이지만 아무에게나 권할 순 없지 않은가. 남은 석 달을 요가덕분에 바라던 행복한 임신기로 잘 마무리짓고 2001년 여름 난 둘째를 건강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낳았다. 첫째 출산의 강렬한 기억이 채 가셔지기 전이므로 겸손하게 치르자고 생각했다. 열심히 했지만 명함도 못 내밀 짧은 수련기간에 구체적인 성과를 기대하는 것은 욕심인 것 같았다. 그저 평화로운 임신기를 잘 보내게 도와준 것만으로도 지극히 만족하고 감사하며... 출산 당일, 병원은 가능한 늦게 들어가는 것이 좋다는 생각으로 남편의 도움을 받아 자궁수축의 시간을 재가면서 출산할 병원 근처의 개천주위를 산책했다.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진통이 올 때면 더욱 편안하고 자연스런 호흡이 되도록 잘 느끼면서 바라봤던 밤하늘의 별들은 유난히 총총했다. 한 시간이 넘게 산책하고 밤 11시경 병원에 들어가 수속하고 옷을 갈아입고 배정 받은 침대에 누웠다. 분만실에서 한 산모의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새어나왔고, 내가 있는 대기실에서는 그의 가족인 듯 부산스런 움직임과 얘깃소리가 좀 신경 쓰이더니 자정을 넘기자 모두 사라지고 나와 남편만이 남았다. 의사도 내진하고 나서 둘째 아이라는 말에 네다섯 시나 되서 보자고 하곤 눈 붙이러 올라갔다. 적막하리만큼 조용해졌다.난 그동안 누워서 관해 보던 상태에서 일어나 명상자세로 앉았다. 남편은 뭔가 라도 해주고 싶어했지만 난 혼자이고 싶었다. 이제 겨우 요가에 입문한 나로선 너무 쉽게 보고 듣는 경계에 떨어지므로 조용히 나를 내버려두는 환경도 절실히 필요했다. 그리고 명상과 가벼운 아사나 동작이 반복되었다. 가볍게 목과 어깨, 허리의 긴장들을 풀면서 자궁수축이 시작되면 멈춰선 진통을 잘 ‘느꼈다’. 눈을 감고 느낄 땐 진통의 파고와 함께 백열등이 바로 내 눈 앞에서 환하게 켜지는 느낌이었다. 빛의 밝기를 조절할 수 있는 전구가 차차 밝아지다 밝아지다 저러다 전구가 터져버리지나 않을 까 싶을 정도로 눈이 부실 때쯤 진통은 서서히 가라앉았다가 또 다시 반복되었다. 너무 조용해서 이상해 와본 당직 간호사는 커튼을 들춰보곤 남자는 곤히 누워 있고 여자는 전혀 출산중인 여자답지 않은 평온한 모습에 당황해했다. 남편은 나중에 말하길 가부좌를 틀고 단정히 명상하는 내 모습이 정말 존경스러웠다고 했지만 난 사실 그 순간 살얼음을 건너는 기분이었다. 지극히 평화로운 명상의 순간과 으악 비명이 터져나올 만큼의 고통의 순간이 백지의 양면처럼 존재한다는 사실을 체감하였다. 그만큼 어떠한 순간에도 명상을 할 때처럼 지극히 고요하고 평화롭게 있을 수 있는 일은 무척 쉬울 수도 또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순간의 호흡이라도 놓치면 초보자인 지금의 나로선 걷잡을 수 없이 몸에 가해지는 자극에 휩쓸려버릴 것이란 것을 직감하였다. 점점 터질 듯이 환해지다 이젠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약해지려는 마음, 그리고 그마음을 추스르고자 하는 자신 사이에서 오가고 있을 즘에, 양수가 터지고 둘째가 내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간호사는 황급히 자고있는 의사를 깨워 불러 내리고 난 분만실로 옮겨진 직후, 두어 번의 힘주기로 건강한 여자아이를 출산했다. 새벽 1시 반이었다. 출산 시에 지나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아서 몸의 상태는 첫아이 때와 비교할 수없이 가벼웠다. 참으로 모든 것이 감사했다. 지금 그 아이들이 네 살, 세 살이 되었다. 아이돌보기로 분주하게 하루 하루가 간다. 일상의 경계에 빠져 마음도 몸도 조금씩 굳어지고 게을러졌다. 육아스트레스... 너무 귀엽지만 때때로 끔찍한 악동, 찰거머리로 변신하는 녀석들.... 아이에게 소리지르고 뒷 감정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아지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난 아련한 첫사랑이라도 되듯이 요가가 그리웠지만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거의 꼼짝을 못하다가 요가를 위한 짬을 내게 된 건 2, 3주 전부터이다. 그 사이 해가 두 번 바뀐 것이다. 착한 남편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았던 소중한 아침잠을 날 위해 희생해주었다 . 남편과 아이들에게 잠깐 미안한 맘을 뒤로하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선다. 잊을만 하면 한두 번씩 불쑥 나타나 눈도장을 찍은 탓일까. 요가원 식구들은 암암리에 나를 오래된 회원으로 분류하고 있다.
다시 시작한다. 예전만큼 잘 되진 않지만 걱정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풀어놓고, 잘 하려는 마음마저 내려놓는다. 다만 모든 자극을 잘 느껴주다 보면 마음은 절로 지극히 고요하고 편안해질 테니까....
* 2003년 7월 4일 본원 박신희 회원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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